생명과학 연구를 진행하다 보면 빠질 수 없는 한 실험기기가 있다. 바로 현미경이다. 현미경은 미시적인 것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실험기기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현미경은 빛의 굴절과 반사 등을 이용하여 상을 크게 만들어서 이를 보는 아날로그적 방법을 사용했다면, 현대의 그것은 이미지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모니터에 비춰준다. 그렇다면 나는 모니터를 보는 것 인가 그 미시적인 물체를 보고 있는 것인가.

시각이라는 감각은 인간이 매 순간 받아들이는 정보 중 가장 밀도 높고, 다채로운 감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평생 무엇인가를 보며 생활한다. 꿈을 꾸며 무언가를 보았는가. 꿈에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또는 꿈에서 맛이나 향을 느껴 보았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경험이 월등하게 많을 것이고 이는 시각이 가장 밀도 높은 기관임을 방증한다.

심지어 ‘보다’라는 말은 경험을 나타내기도 한다. “너 이 책 읽어 ‘본’적 있니?”, “~을 먹어 보았다”와 같은 문장들에서는 ‘보다’라는 용언은 보조 용언으로써 앞 동사를 수식하며, 어떤 행동을 시험 삼아 함을 나타내는 말로써 즉 경험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유추해 보건대, 이는 기억 중 가장 많이 남아있는 정보가 시각이기에 경험을 나타낼 때 자연스레 ‘보다’라는 용언을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앞선 문장들로써 ‘보다’라는 행위를 단순 정보를 입력받는 행위보단 정보를 입력받고 저장하는 행위로 인식했으면 한다. 지금부터는 이 ‘보다’라는 행위를 후자의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탐구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본다’라는 행위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색각에 대한 접근을 달리 한 사람은 뉴턴이라고 할 수 있다. 뉴턴 이전까지 사람들은 태양 빛이 하얀 것은 하얀색이기 때문이고, 어떠한 색깔로 물체가 보이는 까닭은 그냥 그 색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704년 뉴턴은 광학이라는 책에서 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그는 광학에서 오늘날 우리에겐 잘 알려진, 프리즘을 이용해 빛을 분리하고, 합치는 실험을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이 갇혀있던 사고의 틀을 깨 주었다. 즉 ‘색’이라는 것이 물체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던 기존 사고를 색은 빛 때문이라 정정해 준 것이다. 다만 그는 아직 왜 450nm이라는 파장을 가지는 전자기파가 파란색으로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1866년에 이르러서야 프리시오프 홀름그렌 교수가 빛에 대한 눈의 전기적 반응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일종의 활동전류를 관찰했던 것이다. 다만 그는 어떤 빛에 대해 우리 눈에서 어떤 전위가 생성되는지는 아직 알지 못했다. 1932년 에이드리언 박사는 감각기관에서 받아들인 정보가 전기신호로 변환되고 어떤 신경을 통해 중추로 전달되는지에 관한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랑나르 그라니트 박사는 빛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망막에 존재하는 세포들을 발견했고, 전기 생리학적인 방법을 이용해 각각의 분광 민감도를 측정하였다. 그는 이 연구에서 세 가지 파장에 특징적으로 반응하는 여러 형태의 세포가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이후 월드 박사와 그의 연구팀에 의해 실험 결과가 생화학적으로 검증되었다. 더불어 월드 박사는 빛을 만난 눈의 일차적 분자 반응, 즉 간상세포의 존재와 이의 특징을 규명하기도 했다. 간상세포는 타 광수용세포인 원추세포보다는 반응이 느리지만, 이 때문에 더 민감한 빛을 감지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월드 박사는 간상세포가 498nm 즉 초록, 파란색에 대해 가장 민감하고, 640nm 이상 파장의 빛, 즉 붉은색 빛에 대해 낮은 감도를 가짐을 알리기도 했다. 이 연구는 새벽이나 저녁과 같이 빛이 약할 때 붉은빛보다는 푸른 빛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퍼킨제 효과(Purkinje effect)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잠시 현대로 돌아와 이제 우리는 이가 빨강, 초록, 파랑을 각각 감지하는 세 종류의 광수용체, 즉 원추세포와 옵신 단백질에 의한 것임을 안다. 그라니트 박사에 이어 케퍼 하틀라인 박사는 다양한 강도, 시간에 대한 조명을 감각세포에 쬐어주며 이때 발생하는 전류를 분석해 우리 눈이 빛에 대한 자극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하는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들은 시각과 관련된 연구를 진행하면서 척추동물뿐만 아닌 참게나 바다거미의 눈을 연구했는데, 그 눈들에서 공통적으로 측부 억제 현상이 관찰되었다. 여기서 측부 억제 현상이란 특정 광수용체가 자극을 받아 흥분할 경우 그 광수용체 근처 광수용체들의 활동이 억제됨을 말한다. 그라니트와 하틀라인은 이 현상이 특정 물체가 그 물체가 아닌 배경과 구분하는데 기여함을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이 공로들을 인정받아 그라니트, 월드, 하틀라인은 1967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뉴턴부터 조지 월드까지, 위에서 거론한 과학자들 외에도 수많은 과학자의 도움으로 이제 우리는 물체가 특정 파장의 빛은 흡수, 특정 파장의 빛들은 반사한다는 사실, 세 가지 파장의 빛들을 받아들이는 광수용체 세포들의 조합으로 물체가 반사해낸 빛들을 감지하고, 이를 전기신호로 변환하여 중추 신경계로 전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의문을 제기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 사람의 광수용체는 3종류뿐인가? 여러 종류의 광수용체를 가지고 있다면 더 많은 색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오늘날 자칭 지구의 주인이자 가장 진화된 종이라 주장하는 인류의 광수용체는 3종류로 많지 않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파충류는 3가지의 광수용체를, 대다수의 조류 또한 4종류의 광수용체를, 하지만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는 3개의 광수용체를, 기타 포유류는 두 가지 색을 기본으로 사물을 본다. 분명히 우리 영장류와 조류나 파충류보다 더 가까운 친척인 포유류가 왜 2가지 광수용체를 가지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김이 당연하다. 해답은 위 문장 중 ‘오늘날’ 자칭 지구의 주인이 인류라는데 있다. 오늘날 지구가 아닌 까마득한 과거, 약 2억4000만 년 전을 생각해보자. 포유류가 막 등장해 공룡과 공존하던 트라이아스기, 지구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때에도 포유류였을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시 지구의 주인이 공룡 즉 대형 파충류였다고 답할 것이다. 당시 지구의 주인이라 칭할 수 있는 존재들은 대형 파충류였고, 햇빛이 많은 낮에 활동을 주로 하는 존재들 또한 이들이었을 것이다. 즉 그들은 밝은 장소에서 활동했다는 것이다. 밝은 장소에서 주로 활동한 그들은 포유류에 비해 많은 빛을 볼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에 반해 대개 지하에서 생활하고 야행성을 띤 초기 포유류는 시각 자체가 그리 의존할 만한 감각이 아니기 때문에 청각이나 촉각 등을 발달시켜나갔을 것이다. 당시 군림하던 대형 파충류가 현재 조류, 파충류로 진화된 것이고, 상대적으로 시각의 발달이 필요 없었던 초기 포유류의 후손이 우리라면.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광수용체가 파충류에 비해 적은 것이라면, 필자는 이만한 설명이 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색각 하면 빠질 수 없는 이야기에는 색맹이 있다. 흔히 적록색맹은 남자에게 주로 일어난다고 한다. 왜 적록색맹은 남자에게 주로 발생할까에 대한 답변 또한 이 글에서 얻은 지식으로 가능하다. 이전에 말했던 광수용체 단백질인 옵신, 이 옵신은 R, G, B 별로 호출하는 유전자가 각기 다른 염색체에 기록되어 있다. 파란색을 감지하는 DNA는 7번 상염색체에, 나머지는 X염색체, 즉 성염색체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 만약 어떤 남성에게 빨강, 또는 초록을 감지하는 단백질을 호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일어나 정상적인 전사 번역 과정으로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자. 이 남자는 소위 색맹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여자에게 빨강, 초록을 호출하는 단백질에 염색체의 돌연변이에 의해 생성되지 못한다면? 추가 X염색체에서 이를 생성함으로써 사실상 본인은 문제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운이 조금 좋은 경우라 할 수 있는 경우도 생긴다. 만약 돌연변이에 의해 여자가 초록을 감지하는 옵신 단백질이 조금 다른 파장의 빛을 잘 수용하도록 바뀐다면? 그녀의 다른 X염색체는 그녀가 초록을 수용하는 옵신을 만들지 못했다고 판단하고 이를 전사, 번역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총 4개의 광수용체를 가지게 된다. 즉 일반인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색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다”라는 용언에 대한 인류의 생각을 진화론 및 유전자적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과거 군림했던 대형 파충류는 4개의 광수용체를 가지게 되었지만 현재 자칭 지구의 주인인 우리는 일반적으로 3개의 광수용체를 가지게 되었다. 현대에 와서 우리는 이 3개의 광 수용체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고작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보낸다. 필자도 지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글을 쓰고 있고, 출력해서 읽지 않는 한 대부분의 독자 또한 모니터로 이 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고작 이 모니터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는 수많은 과학자, 공학자가 노력한 결과이고 인류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모니터로 보이는 모든 것을 믿어서는 안 된다. 보이는 것이 모두 진짜가 아니다.

착시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시각(視覺)에 관해서 생기는 착각. 착시는 외계 사물의 크기·형태·빛깔 등의 객관적인 성질과 눈으로 본 성질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경우의 시각을 가리키는데 이와 같은 차이는 항상 존재하므로 보통은 양자의 차이가 특히 큰 경우를 말한다.

“객관적인 사실과 눈으로 본 사실의 차이가 큰 경우” 나는 이가 인터넷 상에서 크게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가짜뉴스, 허위 및 과대광고 등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봐 왔지만 이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이는 대로 믿으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초반에 언급했듯 인간이 가장 의존하는 감각이 시각이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레 시각적으로 얻은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

즉 일상생활에서, 특히 인터넷상에서 모든 것들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사실 한 번쯤은 다들 들었을 법한 고리타분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언급하여 강조하는 이유는, 특히 우리 과학을 하고자 하는, 또는 과학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욱더 이런 시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기존 정형화된 이론이라도 한 번쯤 비판적으로 사고해보는 것, 그것이 과학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피곤한 과정이다. 하지만 자신의 두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의심해 보는 것, 이 피곤한 과정을 즐기는 과학자가 되는 것, 그것이 내 바람이다.

참고문헌

  1. DOUGLAS C. GIANCOLI (대표역자 : 이춘우), [대학물리학 제 4판], 822-827, 탐구당, 1995년

  2. Sherwood, Klandorf, Yancey (강봉균 외 6인), [동물생리학], 210-213, 라이프사이언스, 2009년

  3. Cindy L. Stanfield (문자영 외 6인) , [인체생리학 6판], 269-281, 바이오사이언스, 2018

  4. Campbell 외 6인 (대표역자 : 전상학), [캠벨 생명과학 10판], 1150-1151, 바이오사이언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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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sungho.choi)

2022-01-19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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