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몇몇 추리소설에 대한 간접적인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주의하세요.
- 양자역학과 본격 추리소설의 결합
“그 이야기를 들으니 자연스레 그게 떠올랐습니다.”
“뭐가요.”
“슈뢰딩거의 고양이.”
유다의 별, 도진기
전직 판사, 현직 변호사라는 독특한 경력의 소설가인 도진기 작가의 대표작. 유다의 별이라는 작품의 한 대목입니다. 유다의 별은 고진이라는 변호사가 이유현이라는 형사와 함께 기묘한 사이비 집단의 불가능 범죄를 좇는 소설입니다. 그런 소설에 갑자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주인공의 입을 빌려서 말입니다. 작가의 취향이 이런 쪽인가? 싶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비단 유다의 별이라는 작품 뿐 아니라 추리소설 속에서 양자역학은 정말 자주 볼 수 있는 비유의 대상입니다. 이를테면…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마냥. 양자역학의 유명한 역설 ‘슈뢰딩거의 고양이’에서는 상자를 열 때까지 고양이가 살아 있는 상태와 죽은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가 상자를 연 순간에 어느 한쪽으로 수렴되는데…”
미스터리 아레나, 후카미 레이이치로
교양과학 서적에서 발췌한 내용이라 해도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또한 어느 추리소설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에르빈 슈뢰딩거가 제창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많은 추리 소설가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소설의 문장도 살펴볼까요.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별은, 자기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법이야. 세키구치 군. 아니, 자네가 세키구치 군이라는 보증조차 없는 걸세. 자네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유령처럼 가짜일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똑같이 존재한다네.”
. . .
“세키구치 군, 관측하는 행위 자체가 대상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건 양자역학 아닌가.”
“불확정성 이론일세. 올바른 관측결과는 관측하지 않은 상태에서밖에 얻을 수 없다는 거야.”
우부메의 여름, 교고쿠 나츠히코
주인공인 추젠지와 세키구치는 불확정성 원리를 들며 물리적 실재를 논하고, 현실이란 무엇인가 하는 철학에 대한 논의까지 이어집니다. 추젠지는 과자가 든 항아리를 들어보이며 이 안에 과자가 있을지 뼛가루가 있을지는 열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ㅡ라며 세키구치의 현실을 혼란스럽게 만들지요. 결국 세키구치는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운 산길을 내려가며 자신의 등 뒤에 비실재로부터 비롯된 어떤 존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문학 속 가상의 인물들이 과학 속 최신의 이론에 의해(출간된 것은 80년대이나 소설의 배경이 60년대라는 것을 감안하여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현실은 과연 진정한 현실인가 하는 두려운 의문을 직면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까지 양자역학이 추리소설에서 인용되어 온 예시를 몇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양자역학은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을 뒤엎은 학문입니다. (학술-물리학 부문의 “그래서 양자역학이 뭔데?”라는 특집에서 양자역학의 비국소성을 중심으로 소개드린 적이 있으니 그곳을 참고해주셔도 좋을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미스터리 아레나의 내용처럼, 양자역학은 중첩과 관측, 가능성과 결과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관측이라는 행위가 ‘물리량’을 결정한다는 것은 곧 관측이라는 행위의 간섭이 없다면 ‘물리량은 실재하지 않는다’라는 기묘한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이러한 기묘한 결론은 추리소설-그중에서도 본격과 신본격 추리소설이라 불리는 특정 장르의 특성과 잘 어우러집니다. 문학과 양자역학이 어우러진다고? 왜 그런 일이 발생한 걸까요? 그걸 얘기해보기 위해 먼저 본격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해보겠습니다. 본격 추리소설이 뭘까요? 그 유명한 셜록 홈즈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등을 아우르는 말일까요?
사실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말은 일본으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1841년 에드거 앨런 포-여러분에게는 검은 고양이의 작가로 더 익숙할-의 ‘모르그 가의 살인사건’이 첫 추리 소설이자 첫 밀실 살인으로 불려지고, 그 이후 엘러리 퀸, 존 딕슨 카, 반 다인, 아가사 크리스티, 아서 코난 도일 등의 추리소설가들이 등장했지요. 1800년대 후반, 다양한 영미권 추리소설이 일본으로 수입되고 일본에서는 그야말로 추리소설 ‘붐’이 발생했습니다. 그 유명한 ‘인간 의자’도 1925년 에도가와 란포에 의해 쓰여진 작품이지요. 이 1900년대 초반에 생겨난 새로운 장르가 바로 ‘본격 추리소설’입니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는 추리소설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범죄에 관한 난해한 비밀이 논리적으로 서서히 풀려가는 과정의 재미를 주로 다루는 문학이다.” 한마디로 ‘수수께끼 풀이에 중점을 두는 소설’이란 뜻이다. 따라서 우리는 에드거 앨런 포의 뒤를 이어 그러한 정의를 충실하게 받아드린 작품을 본격 추리소설로 칭한다.
미스터리 클락, 기시 유스케
그 정의를 충실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보통 반 다인의 20칙이나 녹스 10계를 적당히 지키는 작법을 쓰기도 합니다. 여기서 잠깐 그 법칙들에 소개해보자면…
“수수께끼를 해결함에서 독자는 작중의 탐정과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든 단서는 명확하게 기술되어야 한다. 범인은 이론적 추리를 통해서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우연, 암호, 이유 없는 자백 등에 의한 결정은 안 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고생하여 범인을 찾게 하였다가 이것이 잘 안되니까 실은 내 손 안에 모든 단서가 있었다고 놀려주는 것과 같다. 살인방법과 이에 대한 수사방법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한다.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인 방법은 탐정소설에서의 살인일 수 없다…”
반 다인의 20칙 중 일부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 비밀의 통로나 방은 하나면 족하다. 탐정이 단서를 찾았을 때는 곧 독자에게 알려야 한다. 추리소설에서는 탐정 자신이 범인이어서는 안 된다…”
녹스의 10계 중 일부
정말이지 복잡하고 엄격합니다. 물론 이와 같은 법칙들은 현재 완전히 지켜진다기보단 일종의 클리셰로 자리잡아, 판타지 설정이 섞인 퓨전 미스터리나 보다 서스펜스에 치중한 미스터리 등 다양하게 변주되어 오고는 있습니다. 독자를 속이는 추리소설인 서술트릭도 있고요.
아무튼간에, 이러한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1900년대 중반에 들어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사회파 미스터리에 밀려 한동안 주류에서 밀려났습니다. 그러나 1981년,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본격 추리소설의 변주격인 신본격 추리소설이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시마다 소지의 뒤를 이어 등장한 관 시리즈로 유명한 아야츠지 유키토와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 불리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노리즈키 린타로 등이 모두 이 신본격의 대표작가이지요. 베스터셀러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 또한 이 신본격 추리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꽤 긴 설명이 이어졌습니다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본격-신본격을 포함한-추리 소설은 꽤 기이한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격 추리 소설은 작가-다시 말해 소설 속 탐정에게 논리적으로 결함 없는 추리를 요구합니다.
소설에서 제시되는 단서는 오직 하나의 진상을 가리켜야만 하며, 그로써 독자는 작가와 대등하게 대결한다.
그것이 본격 추리소설의 불문율인 것입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이 제시하는 ‘상황’에는 ‘진상’이 될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가 존재합니다. 결국 탐정은 그 수많은 경우의 수를 전부 부정해야 하는 ‘악마의 증명’ 문제에 직면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악마의 증명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은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물리적 실체의 허구성과 꽤 잘 맞물립니다.
아무리 꼼꼼한 상황을 제시해도 작가는 어떤 경우의 수를 놓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사건의 진상이라는 것은 마치 슈뢰딩거의 상자 안에 들어간 꼴이 되어, 탐정의 ‘해결편’을 관측하기 전까지 진상은 확정된 사실이 될 수 없는 것이지요. 즉, 본격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진상이나 진실 같은 것은 사실 상 실체 없는 허구에 가까우며, 탐정의 선언을 통해 완성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본격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골머리를 앓는 문제이자 매력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관측을 통해 실체가 된다는 양자역학은 본격 추리소설의 본질과 상당히 닮아있으며, 작가들에게 매혹적인 비유의 대상으로 다가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비단 안티 미스터리적인 해학 뿐 아니라-앞서 든 예시들 처럼 소설 속 사건 그 자체, 혹은 작품 주제에 대한 비유로도 쓰이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이러한 견해에 대해 확대해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과학과 문학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고요-그러나 과학은 특히나 서구 철학에서, 늘 철학과 인간의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습니다. 동시에 철학과 문학이 과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지요. 특히나 양자역학은 고전역학 사고관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사고관을 철저히 파괴시켰으며, 허구와 실체, 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견해와 사고의 폭을 제공한 학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본격 추리소설이라는 이 매니악한 장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 현학 미스터리의 좋은 재료
앞서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마쳤기에 앞으로의 소개는 보다 쉬우리라 생각했습니다만, 큰 산이 하나 생겨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름은 알아도 완독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그러한 장르의 책. 바로 현학 미스터리입니다. 반 다인이 대표작가인 장르로, 말그대로 현학, 지식을 뽐내는 듯한 장르이지요. 그리고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은 일본 3대 기서로 뽑히는 극강의 현학 미스터리입니다. 사실 흑사관 살인사건의 현학적인 장광설의 대부분은 서양 철학과 일본 오컬트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합니다만, 그 장광설의 양이 워낙 방대한 탓에 과학에 대한 장광설도 꽤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 중 일부를 소개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우주 구조 추론사에서 가장 화려한 장면이라면 아마도 그 가설 대립,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 사이에 오간 공간 곡률에 대한 논쟁이 아닐까요? 그때 지터는 공간 곡률이 공간 고유의 기하학적 성질에 따른다고 했는데, 그것은 동시에 아인슈타인의 태양 역설까지 반박하는 주장입니다… 그럼 먼저 태양 역설부터 말해보면, 아인슈타인은 태양에서 나온 광선이 구체 우주의 둘레를 돌아 원점으로 되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처음으로 우주의 극한에 도달햇을 때 그곳에서 첫 번째 상을 만들고… 그 뒤 지터는 가설을 이렇게 수정했습니다. 거리가 멀어질 수록 나선형 성운이 스펙트럼이 붉은 쪽으로 이동해가므로 그에 따라 광선의 진동 주기가 느려진다고 추측한 거지요. 때문에 우주의 극한에 도달할 때면 광속이 제로가 돼 그곳에서 진행을 딱 멈추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주의 둘레에 비치는 상은 단 하나뿐이며 아마도 실체와 다르지 않겠지요…”
….
아아, 노리미즈는 내행성의 궤도 반지름 축소를 빗대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것일까? 검사도 구마시로도 근대 과학의 정수를 쏟아 부은 노리미즈의 추리 속에 설마 연금술사의 어슴푸레한 세계가 전기 화학 특유의 유사성 법칙과 함께 나타날 줄은 생각도 못했다.
흑사관 살인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두 페이지 내내 이어지는 장광설이기에 많이 생략했다곤 하지만, 과학을 좋아하는 사람이 보아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습니다. 의도적으로 독자의 이해를 차단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나 현학 미스터리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압도될 듯한 방대한 지식의 향연. 탐정의 권위를 세우는 장치에 불과하지 않냐는 빈정거림도 존재합니다만, 장광설이 빚어내는 특유의 분위기에는 그 나름의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물론 안티 미스터리 계열에서는 이러한 현학 미스터리를 통렬히 비꼬기도 합니다.)
자, 그러니 현학 미스터리에서 과학이 좋은 재료라는 것은 더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독자로하여금 왠지 어려운 이야기, 그러나 있어보이는 이야기, 어딘가 전문적이고 외래어가 가득하며 적당히 신비로워 사건이나 작품의 주제와 엮기도 좋은 것… 게다가 사건의 트릭에 과학적인 전문 지식이 등장할 경우, 독자와의 대결을 페어하게 만들기 위해 장광설 속에 그 지식을 살짝 섞어두는 것에도 용이합니다.
어라, 그런데 과학적인 전문 지식이 등장하는 추리소설이라. 생각나는 작품이 있지 않나요?
- 이과 미스터리?
“우리같은 일반인은 쉽게 신비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어. 그걸 막는 것이 바로 과학 아니겠어? 자, 가지.”
예지몽, 히가시노 게이고
네,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인기가 많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명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대표되는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입니다.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가 있지요. 정작 용의자 X의 헌신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만, 사실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물리학자가 주인공으로써 ‘과학이 이용된 트릭’을 밝혀내는 것이 주제였습니다. 1권인 탐정 갈릴레오와 2권인 예지몽, 5권인 갈릴레오의 고뇌는 과학이 사용된 살인 사건이 모여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더불어 한국에는 출간되지 않은 책에서도 과학적 트릭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자세히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이 작품들에서는 플라즈마, 레이저, 화학물질, 홀로그램 기술, 전자기학적 장치 등 다양한 과학 기술이 등장하고, 형사 구사나기를 위해 유가와 교수가 그것들을 해설해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형식입니다. 작가의 공학부 출신이라는 경력이 빛을 발한 작품들이었지요.
이렇듯 과학 기술이 이용된 미스터리, 혹은 이과적 분위기가 다분한 작품들을 흔히 이과 미스터리라고 합니다. 이과 미스터리의 대표격이라 불리는 작품으로, 모리 히로시의 S&M 시리즈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사이카와 교수님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학생이 수학이 대체 어디에 쓸모 있느냐고 물어온다면요.”
“나라면 왜 쓸모 있어야만 하느냐고 되묻겠지. 원래 쓸모없는 쪽이 더 즐겁지 않나?”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 모리 히로시
작가가 이학부 교수이자 연구자이기에 쓸 수 있는 대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코사인곡선을 적분하면 사인곡선이 되지. 부메랑이 되돌아오거나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는 메커니즘의 원리가 바로 그거야. 과연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을지 궁금하네.”
시적사적잭, 모리 히로시
이렇듯 이공계 출신 캐릭터들의 다분히 이과스러운 대화 뿐 아니라, 이 작품은 그 배경과 사건 자체도 이과의 특성을 지니고 있곤 합니다. S&M 시리즈의 첫 번째이자 메피스토상 수상작에 해당하는 ‘모든 것은 F가 된다’는 천재 컴퓨터 공학자 마가타 시키가 거주하는 무인도의 연구소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작품이 출간된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던 VR이 등장하고 연구소라는 배경 특성 상 프로그래밍에 관한 이야기도 빈번히 등장합니다. 2권인 ‘차가운 밀실과 박사들’은 저온 연구실에서 일어난 살인을, 4권인 ‘시적사적잭’도 대학 연구실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이 S&M 시리즈는 건축학과 조교수 사이카와 소헤이와 대학생 니시노소노 모에가 등장하며, 클로즈드 서클이나 밀실 살인 등 본격 추리소설의 정수를 표현하면서도 이과스러운 분위기나 배경, 인물, 대화 등을 매력적이게 녹여낸 작품으로 높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모든 것이 F가 된다’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밀실 대도감’에서 소개된 작품이기도 한데요,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이 작품이 이과 미스터리라 불리는 사실을 언급하며 동시에 추리 소설 자체가 ‘이과계와 문과계의 파도’이지 않냐고 말합니다. 일반적인 문학과 달리 명확한 정답을 추구하며 수수께끼에 집중하고, 시체와 범인, 탐정은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역할에 불과하며 작위적인 배경 또한 일종의 ‘변인 설정’과 같다는 의미겠지요.
따라서 이과 미스터리는 본격 추리소설에 상당히 잘 어울리는 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현실성을 추구한다면 필연적으로… -클로즈드 서클
비단 본격 추리소설, 현학 미스터리, 이과 미스터리 뿐만 아니라 사실 미스터리라는 장르 자체에 과학은 사실 빠지기 힘든 지식입니다. 기본적으로 시신이 등장하고, 독극물이 쓰이며, 특히 현대 수사물의 경우 과학 수사가 빠질 수 없으니까요. 따라서 작품의 현실성을 추구하기 위해서 기본적인 과학은 인용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 탓에 ‘미스터리 작가를 위한 법의학 Q&A’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추리 소설 작가가 직접 조사하고 쓴 ‘모든 살인은 증거를 남긴다’와 같은 서적들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드라마 ‘검법남녀’와 같이 법의학 자체가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하고, 그 유명한 미국의 드라마 ‘CSI’도 과학 수사를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사사키 선생님께서 보기 전에 추리소설 팬의 소견을 들어봅시다. 강직성 경직이라는 게 뭡니까?”
“간단히 말하면 보통은 사망 후 두 시간쯤 지나서야 시작되는 시체의 경직이 사망 후 바로 시작되는 거예요.”
여왕국의 성, 아리스가와 아리스
이과와는 인연이 없는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에도 이러한 장면이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그러니 살인 사건을 대상으로 하는 추리 소설에서 과학-비단 법의학 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인용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법의학이나 과학 수사가 그리 훌륭하지 않았을 것 같은 1990년대에 쓰여진 추리소설들또한-아니, 그 시절이기에 더더욱-법의학적 지식들이 자주 인용되어있습니다. 이과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한참 먼 정통 신본격인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에서는 추리소설작가에 불과한 시마다 기요시라는 탐정이 시신의 경직 정도를 보고 사망 시각을 추정하거나, 과거의 추리소설에 사용되었던 트릭에서 힌트를 얻어 독극물의 정체와 사인을 알아내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이 과해지면 그건 그것대로 독자와의 대결에서 ‘불평등’한 요소가 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작품의 재미를 떨어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미스터리 작가들은 클로즈드 서클-무인도, 눈 내린 산장 등 외부와의 출입이 차단된 곳-이라는 배경을 활용함으로써 미스터리적 재미와 현실성 사이의 중화점을 쟁취하곤 합니다.
“한정된 용의자, 범인과 함께 갇힌 데에 기인한 서스펜스-클로즈드 서클 테마의 또 하나의 특징적 상황을 논하시오.”
에가미 선배는 좁은 텐트 안을 담배 연기로 가득 채우며 말했다.
월광게임:Y의 비극’88, 아리스가와 아리스
저 질문의 정답은 ‘과학적 수사 기법의 개입 불가’입니다. 즉, 너무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의 개입을 차단한 채 오직 탐정의 머리에만 의지하여 현실성과 미스터리의 규칙을 준수하도록 한 것이지요. 그러니 적당한 수준의 지식을 가진 탐정에게 클로즈드 서클이란…
“명탐정이 활약할 무대를 얻었다, 이건가요? 어디 마음껏 해보시죠.”
미로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
활약할 수 있는 최고의 무대인 것이죠.
- 번외-과학을 인용하지 않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호러, 오컬트, 판타지)에서는 어떻게 논리성을 추구하는가?
앞서 현실성을 추구한다면 과학이 필연적으로 인용될 수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반 다인의 20칙에 의거-본격 추리소설은 모두 과학적 사실만을 기반으로 할까요?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900년대 후반의 신본격 추리소설은 본격 추리소설의 변주격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시피, 틀에만 얽혀 있어서는 새로운 소설을 창조해낼 수 없을테니까요. 호러, 오컬트, 판타지 세계관에서 어떻게 본격 추리소설을 쓸 수 있을까요? 다시말해, 어떻게 논리성을 추구하여 독자와 공정한 대결을 펼칠 수 있을까요?
여기서는 판타지 설정에도 불구하고 독자와의 공정한 대결을 펼친 작품을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바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겐자키 히루코 시리즈’와 키타야마 타케쿠니의 ‘클락성 살인사건’입니다.
‘겐자키 히루코 시리즈’의 1권인 ‘시인장의 살인’은 약간 가벼운 문체임에도 불구하고 본격 미스터리 100,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등 데뷔작으로 3관왕을 차지한 화제의 작품이었습니다. 최근 영화화가 된 적도 있었고요. 이러한 인기의 이유는 ‘좀비’라는 충격적인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본격 미스터리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규칙을 충실히 지키며 본격 미스터리다운 추리를 선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후속작인 ‘마안갑의 살인’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진 것으로 보아 이마무라 마사히로 작가의 잠재력은 3관왕에 걸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튼 ‘시인장의 살인’은 그 충격적인 소재를 본격 미스터리의 도구로 훌륭히 승화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세한 소개는 강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이만 하겠습니다.
“시간이 다른 세 개의 시계가 설치되어 있는 수수께끼의 클락성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 이야기가 펼쳐진다. 당장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탐정 미키, 그리고 수수께끼에 싸인 그의 친구 나미, 클락성에 틀어박힌 채 두문불출하는 쿠로쿠 박사, 잠만 자는 미녀, 나르콜렙시 환자 린 등 독특한 캐릭터들을 통해 시공을 초월한 세계관 속에서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제24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데뷔작인 이 작품은 큰 인기를 끌었던 ‘성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소개
이처럼 ‘클락성 살인사건’은 멸망해가는 세계라는 특이한 배경을 바탕으로 극강의 물리 트릭을 선보인 것으로 사랑받았습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또한 이 책의 물리 트릭에 대해 극찬하였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판타지 설정이라도 일본의 엘러리 퀸이라 불리는 작가의 마음에 들 정도로 정통 본격 미스터리다운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미스터리 작가들이 어떤 과학을 왜 인용하였고,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여러 추리소설들의 예를 들며 살펴보았습니다. 한국에서는 꽤 매니악한 장르로 취급되는 미스터리지만, 이번 기회에 한 번 접해보는 것은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