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지 않았더라면 과거도 우리를 부르지 않았으리라. 부스러지는 파도 소리처럼 밀려오는 자학감에 P는 참을 수 없어 건조한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자살했다. 그것이 P가 내린 결론이었다.
1
“미시세계에서는 이따금, 일어나선 안 될 일들이 일어나.”
그의 표정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양자역학이라느니 상대성이론이라느니, 물리학에 큰 관심은 없는 P였으나 F가 하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지겨울 정도로 해대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가 순수한 얼굴로 얘기할 때면 상관없어지곤 했다.
“질량 보존이나 에너지 보존처럼 위배되어서는 안 될 법칙들도, 아주 작은 곳에서, 아주 찰나라면 위배하는 것이 가능해. 정말 찰나이고, 정말 작은 확률인데다가 결론적으로는 다시 보존되어야 하지만… 있잖아,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구분하는 건 사실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내 말은 말이지, 이 거시세계…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현실에서도, 질량 보존같은 법칙을 잠깐이나마 위배하는게 가능하지 않을까…”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양반이 할 말인가 싶었으나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이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P는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러나 질량보존법칙의 위배라. 무한동력장치가 가능하다는 말과 비슷한 계열의 말로만 들려 P는 아리송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게다가…
“그게 가능해지면 뭐가 좋은데? 어차피 찰나에만 가능하다면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아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을 만큼의 비정상이 생긴다는게 중요한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말했잖아, 너무 찰나라서. 너무 조금이라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 할 뿐 지금 내 손바닥 안에서는 쌍생성 쌍소멸 입자들이 끊임없이 움직이며 분명… 질량 보존이 위배되고 있어. 보존의 불확정성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F의 목소리는 고양되어 가느다란 현마냥 떨리고 있었다. P는 신기했다. 중요한 입시가 코앞인데도 F는 늘 이상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흥분하고는 했다. 누구나 앞을 바라볼 때 그는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허공을, 아니, 허공이기는 했을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눈동자로 고양감에 도취해있고는 했다. 그리고 P또한 앞을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P는 앞 대신 F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인지할 수 있게 되면… 뭐가 좋냐니까?”
“그렇게 되면, 아마도… 나는 나를 만날 수 있겠지.”
F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황량한 갈대 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일렁이고, 건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의 눈가는 붉어져 있었다. 그는 종종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 아니, 이유는 있었겠지만 P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굳이 알려 하지도 않았다. 알려 하지 않았음을, 먼 훗날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그날은 그들이 고등학생으로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가을이자 P가 살아있는 F를 본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바쁜 입시 생활의 끝에 F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P는 굳이 그를 찾으려 들지 않았다. 기인이었던 F를 그리워는 했으나 엄청난 절친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P의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았고, 미래는 창창하다-까진 아니어도 불안하진 않았다. 누구보다 행복하다 자신할 순 없지만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평범한 삶. 평범한 연애 끝에 평범한 결혼. 평범한 가정. 조금 부진했지만 결국 합격해낸 형사 승진 시험. 경위가 된 기념으로 비싼 스테이크 레스토랑에 가족들과 함께 방문한 P는 안온한 미소를 지은 배우자를 바라보았다. 옆에는 갓 중학교에 입학한 아이도 있었다. 아이는 반투명한 디스플레이에 집중하던 시선을 거두고 눈동자를 반짝이며 P를 바라보았다.
“시간여행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대.”
“시간여행이라.”
P도 익히 들어본 이야기였다. 형사인 P가 그리 흥미를 둘만한 주제는 아니었으나 매스컴에서도, 주변에서도 하도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판에 어쩔 수 없었다. 근 5년 간 시간이라는 물리량에 관한 연구가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다고. 한 명의 천재가 개혁을 이끌어내던 과거와 달리 현대의 연구란 협업과 융합, 그리고 고도의 복잡으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5년 전, 수수께끼의 학자가 발표한 ‘시간 차원에서의 이동에 관한 대통일 이론적 해석’이라는 단 한 편의 논문은 지금같은 파란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당시 세간에서는 마치 내년에라도 시간 여행이 가능할 것 마냥 떠들어댔으나 P는 시큰둥했다. P는 현재에 만족할 뿐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그것도 패러독스니 뭐니 하는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는 시간 여행이라는 것이 그리 빨리 이루어질 수 없음을 은연 중에 알고 있던 것이었다. 게다가 이론으로든 직감으로든, 시간 여행에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을까-예상도 하였다. 어쩌면 아직 인간은 그정도의 에너지를 손에 넣을 기술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과거로 갈 수 있는 시간 여행기가 발명된다면 P는 그 시절의 F를 한 번만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기묘한 인간을 어른이 된 지금 볼 수 있다면 좀 더, F에 대해 알아볼 수 있지 않았을까.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선망, 동경. 모두가 바라보는 앞 대신 그 기인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길 없는 숲을 탐험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기분은 10년도 더 지난 지금에도 남아있었다. 나는 어른이 되었는데, 그 녀석은 어떠려나. P가 상념에 젖어 서늘한 나이프를 집어들어 고기에 대었을 때, 순간적으로 시야가 암전되었다.
깜빡.
전등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떨리며 암전과 병영을 반복했다. 붉은 융단이 깔린 레스토랑 내부가 검붉게 번쩍거렸다.
“정전인가?”
P의 차분한 목소리에 P의 배우자는 작은 목소리로 ‘아마도’라고 중얼거렸다. P의 자식은 큰 눈망울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이내 퍽, 소리와 함께 전등이 페이드아웃해가는 잔상만을 남기며 숨죽였다. 곧 테이블마다 놓여진 마이크로 스크린으로부터 정전이 되었다며 사과의 안내문을 전달하는 아바타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P는 묘한 위화감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완벽한 어둠. 도시 전체가 어둠에 휩싸인 채였다. 블랙아웃? 모든 도시가 자체적으로 발전을 하며 유기적으로 연결된 이 시대에 흔치 못할 일이었다. 게다가 거의 대부분의 전기는 무선으로 공급된다. 중간에서 가로챈다 한들 이처럼 막대한 양을 한번에 가로챘다간 폭발이 일어나거나 전기를 저장할 전지가 용량을 버티지 못하고 스파크를 튀며 죽었을 것이다. 하긴, 지금 원인은 중요치 않다. 한 도시가 블랙아웃될 정도라면 아마 다른 도시에서도 어느정도는 정전 사태가 일어났을 터. P는 침착하게 마이크로 스크린을 터치하였다. 곧 방금 안내문을 전달했던 아바타의 이미지가 입을 열었다.
‘현재 위치하고 계신 도시가 블랙아웃 되었으며 근교 3개의 도시에서 큰 정전, 하부 도시에서 소규모 정전이 발생하였으나 11분 내로 수복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남은 시간, 10분 32초…’
그런가. 원인은 알 수 없으나 11분 내로 복구된다면 그리 큰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2분도 채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의 자가발전 비상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그것은 도시의 다른 구역들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한 소음마저 집어삼킬 듯했던 암흑은 인공의 빛에 부수어지고 그 틈새로 사람들의 소음이 흘러들어왔다. 조금 식어버린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P는 나이프를 힘주어 잡았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발목 언저리에서 스산히 일렁이고 있는 탓이었다.
2
다음날 출근한 P는 한 가지 사건을 배당받았다. 어제 블랙아웃이 일어났던 시간에,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이었다. 사망한 이의 이름을 확인한 P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진을 확인하고서도 굳이 믿고 싶지 않았다. F였다. 어제의 불안감은 이것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F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인식의 오류’라던가 ‘미신’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더욱 암울해져 P는 선뜻 사건 파일을 열어볼 수 없었다. 10년도 더 전에 어떤 인사도 없이 자취를 감춘 친구였지만, 절친도 아닌 그저 그런 친구였지만, P는 분명 F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단 한 번이라도 만나, 인사를 나누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그것이면 족했을텐데. F는 이제 그것마저 불가능한 곳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반투명한 디스플레이 속, 사건 파일 위로 붉은색 원이 빙글빙글 호를 만들며 깜빡이고 있었다. 어서 확인하라는 재촉의 신호. P는 무력하게 손을 들어 화면을 눌렀다. 곧 채도 낮은 푸른 바탕에 새까만 글씨가 떠올랐다. F의 이름 아래 F의 나이, 거주지, 직업 따위의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F의 직업란에는 전직 입자 물리학 연구소 포스트닥이라는 정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5년 전에 그만두었다. 5년 전부터는 무직. 가족도 없고 가까운 지인은 더더욱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망 신고가 일찍 들어온 것은 작년부터 시행된 1인 가구 생체 등록 제도 덕이었다. 연고자가 없는 F가 사망하자 집 내부의 생체 감지 시스템이 그의 죽음을 감지하고 자동으로 경찰에 신고한 것이었다. 물론, 그 시스템도 전기로 돌아가니 신고는 전력 복구 직후에 들어왔을 터. 즉, 도시가 암흑에 잠겨있던 때에 죽었다는 의미였다.
서류로 살펴 본 F는 무엇으로 먹고 사는지도 불분명한 유령 같은 인간이었다. 생체 감지 시스템의 기록을 살펴보니 5년 간 밖에 나간 날은 거의 없을 정도. 인간이 이렇게도 살 수 있는 건가. P는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졌다. 어째서 F는 스스로를 집안에 가뒀을까. 무엇이 F를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게 했을까. 학생이었을 시절에는 굳이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이지만 형사인 지금은 궁금해 할 의무가 있었다. 사건 개요를 넘기던 P는 눈을 크게 떴다.
‘살해 가능성이 보임.’
살해라니. 아니, 총에 맞았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은 했었다. 그러나 직접 문장으로 마주하고 나면 그 무게감은 예감과 다르다. 사람을 무력하게 만드는 선언이 무기질적으로 심장에 와 박히는 것이다. 살해 가능성 근거 목록을 터치하자 번호가 매겨진 목록이 눈에 들어왔다. 첫째, 피해자는 가슴 정중앙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이는 스스로 쏘기 힘든 위치였으며 최소 5m 밖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둘째, 총은 피해자로부터 5m나 떨어진 곳에 떨어져 있었다. 피해자가 총을 맞은 뒤 던졌다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며 피해자는 총을 맞고 쇼크로 즉사했다는 부검 소견이 있다. 즉, 피해자가 총을 던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셋째, 총을 자동으로 발사 시키거나 5m 밖으로 총을 회수할 수 있을 장치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또한 피해자의 손에서 초연 반응이 나왔으며 총은 피해자 소유로 보인다. 따라서 피해자가 어떤 위협에 대항하여 총을 발포한 뒤 총을 빼앗기고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요즘의 인공지능은 대단하다…곤 하지만, 사실 이 정도는 형사가 아닌 사람도 판단할 수 있을 내용이었다. 기술의 발전이 정말 적용되어야 하는 곳에 되고 있는 것일까, P는 요즘 들어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업무 효율의 증진과 철저함을 위해서 라며 폐쇄적이고 정규화된 업무에 적용되는 기술들은 최신 기술의 프로토 타입을 다듬은 값싼 것들 뿐이다. 미래를 흉내내며 표를 얻기 위한 정치인들의 술수. P에게는 그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필요한 요양 보호라던가 법률 사각지대 적발 등, 사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일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결국 숫자. 등호조차 허락치 않는 부등호를 가운데에 두고 사람을 숫자로 치환하여 저울질 한다. 그것이 현명하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다. 숫자만을, 부등호만을 보는 것은 판단하는 자의 역량 부족이다. P는 자신들의 부족과 이기적인 자기 위로를 현실의 문제로 치환하는 세상이 싫었다. 환멸스러웠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안온한 일상 속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자신이 논하기에는 같잖은 입장이지 않나 싶어지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P는 F를 떠올렸다. F라면 답을 줄 것만 같았다.
F를 떠올리게 될 때면 이처럼 생각이 상념 속으로 침잠해 끊기지 않는 소용돌이 속을 허우적거리기 마련이었다. P는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파일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살해가 아닐 가능성 목록을 터치하자 아까보단 적은 목록이 떠올랐다. 첫째, 침입 흔적이 없었다. 블랙 아웃이라는 짧은 순간에 침입했다 하더라도 문을 열고 집을 돌아다닌 물리적 흔적이 전혀 존재하지 않기는 힘들다. 둘째, 피해자에게서 별 다른 저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피해자의 손에서 나타난 초연 반응을 설명할 다른 총알이 발견되지 않았다. 창문은 잠겨 있었다.
만일 타살이라면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 가능하다. F가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을 쏘려다 열린 창문을 향해 총알을 발사한다. 그 뒤 범인이 F를 살해한 후 창문을 잠근다. 다른 것도 가능하다. 범인이 먼저 F를 죽인 뒤 F의 손에 총을 쥐어준 채 창 밖으로 총을 한 발 쏜 뒤 창문을 잠그는 것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문제가 하나 남았다. 그렇다면 범인은… 대체 어디로 나갔는가?
순간이동에 관한 기술은 전적으로 국가의 소유인데다가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은 굉장히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일반 가정집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순간이동은 전송하는 곳과 수신하는 곳 모두 건물 한 채에 해당하는 크기의 설비가 필요한데다가 몇 해 전 기술 결함으로 사람이 죽는 일이 발생하자 사람을 이동시키는 것은 금지되었고 하고자 나서는 사람도 없어진지 오래였다. 즉, 순간이동 기술의 이용은 배제해야했다.
다음은 로봇의 소행을 염두에 두는 것이다. 요즘같은 시대, 로봇이란 것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의지 없어보이는 무생물도 언제든 살인자로 조종되어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을 쏘게 하는 로봇같은 건 들어본 기억이 없다. 게다가 보고서에는 ‘총을 쏘게 하는 장치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이 또한 배제해야 하는 가능성이었다.
이 밖에 P가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달리 없었다. 애초에 이런 류의 문제였다면 국과수라는 전문기관이 나서는 것이 옳았다. P는 현장파의 형사였다. 따라서 할 일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P는 경찰증을 안주머니에 밀어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장에 가보고 싶었다.
3
지저분할 줄 알았던 F의 집은 황량할 정도였다. 시신이 있던 자리를 표시하는 레이저가 탁자에 놓인 조그마한 구체로부터 바닥으로 쏘여지고 있었다. 검붉은 얼룩이 대충 그린 추상화처럼 바닥에 늘러 붙어있었다. 구체를 두 어번 터치하자 시신 발견 당시, F의 모습이 레이저 위에 홀로그램으로 그려졌다. F의 얼굴은 평온한 무표정이었다. 주먹 쥔 양손이 허리께에 얌전히 놓인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어째서냐. P는 F의 환상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총은 시신으로부터 5m 가량 떨어진 바닥에 있었다. 또 총으로부터 1m 정도 뒤에는 기묘한 장치가 있었다. 만일 F의 자살이라면 이 장치가 총을 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장치는 이상한 케이블과 전자 장치의 더미에 연결되어있는 샤워부스일 뿐이었다. 유리문이 달린 샤워부스. 욕실에 있어도 조금 어색해보일 직육면체 형태가 거실에 있으니 더욱 이상했다. 게다가 발판과 찬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있어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살풍경이었다. 버튼으로 보이는 것을 꾹꾹 눌러보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장치가 총을 발사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 법해보이는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국과수에 감정을 맡겨보자고 생각하며 P는 고개를 돌렸다. 살풍경한 거실을 지나 서재로 들어서자 이번엔 어지러운 이미지가 시야를 강타했다. 어마무시한 양의 서류와 책이다… 가운데의 대형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어두운 색조의 양장으로 둘러싸인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다. 창문 하나 없는 서재의 벽 중 문이 있는 곳을 제외한 삼면은 모두 책장으로 빈틈없이 채워져있었다. 종이로 된 자료가 3분의 1정도로 차지하고 나머지는 오프라인 데이터 저장용 하드. 대체 이런 걸 왜 사용하는거지. 하드는 물론 종이 자료의 존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P였다. 천천히 추측해보자, P는 스스로를 타일렀다. F는 5년 전 연구소를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혔다. 즉 이 자료들과 거실의 이상한 장치들은 F가 집에서 독자적으로 연구한 자료들이라고 할 수 있을 터. 호기심에 종이 자료를 몇 들춰보았으나 암호화 되어있었다. 이또한 국과수에 맡기면 해독해주려나? 하지만 어지간한 범죄에 과학이 쓰여 국과수가 최대 수사기관으로 성장한 이 시대, 이런 자잘한 문제까지 맡아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P는 한숨을 쉬며 책상 가운데에 놓인 서류를 집어들었다. 그러고보니 팔락거리는 종이를 만져본 것은 재작년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글이 적혀있는 문서였다. 단 세 장짜리 논문. ‘시간 차원에서의 이동에 관한 대통일 이론적 해석’이라는 제목. 보관된지 오래 된 듯 산화된 종이가 보란 듯 놓여있었다. P는 생각한다. 이 논문이 발표된 것은 5년 전. F가 이 집에 틀어박히게 된 것도 5년 전. F, 넌 시간 여행을 연구하고 있었던 건가?
F는 정말 모든 것과 단절된 기인이었다. 외부와 연락한 것은 문제의 논문을 발표할 때 뿐. 그 외에는 학술지를 정기 전송 받으며 홀로 연구에 몰두했을 것으로 보였다. F의 생활 속에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F도 존재하지 않았다. F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익명의 논문 한 통이 전부였으므로. 그 외의 자료들은 누구도 알아볼 수 없게 쓰여진 문자와 숫자의 배열로, 그것이 F를 증명해 줄 수는 없었다. F는 왜 세상으로부터 도망쳤을까. 외로워서 더 외로워지기로 했을까. 아니면 우리를 무서워했던 것일까. P는 답할 수 없었다. 도망자의 방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간절함을 손끝으로 헤치며 방문을 열고 나섰을 뿐이었다.
국과수의 감정 결과는 실로 기묘했다. 그 이상한 장치가 그날 블랙 아웃의 원인으로 꼽혔다는 소식이었다. 샤워부스 같이 생긴 장치에 연결된 케이블은 외부의 초전도체 안테나와 접속되어 있었고 무선 전송 시스템을 해킹해 도시로 향하는 전력을 훔쳤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훔친 전력이 어떻게 사용었는가는 설명되지 못했다. 국과수는 다만 ‘무언가를 굉장히 가속시켰을것’이라는 의견을 낼 뿐이었다. 가속, 가속이라. 총을 가속시킨다고 해서 총알이 발사되는 것은 아니다. P의 머릿속에 문득 우스운 상상이 들었다. 총을 먼저 쏘고 재빨리 몸을 가속시켜 총보다 먼저 도착한다면? 자신이 쏜 총알에 맞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야만 할 이유가 있을까. 단순히 그렇게 해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도 F에게는 가능할 것만 같았다. 5년을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종이와 데이터를 붙잡고 있던 기인이다. F라면 충분히. P는 감정 결과 파일을 닫고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하지만 과하다. 60k도 채 되지 않는 가벼운 몸뚱이를 총알보다 빨리 가속시키는 것쯤은 도시의 모든 전력을 훔치지 않아도 가능하다. 한 건물의 전력을 훔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즉, F가 가속시키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P는 F의 방에서 가져온 세 장짜리 논문을 집어들었다. 과학에 문외한인 그라도 세 장 정도라면 어떻게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앞의 두 장은 온전히 수식과 외계어같은 단어들로 가득해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대신 P는 결론 부분을 펼쳤다.
‘미래의 자신이 현재의 시간으로 온다면 현재의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의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은 많은 논의를 해왔다.’
결론의 서두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서론에 있어야할 법한 문장이었지만 본디 F는 서론을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론에서 흥미를 유발하여 듣는이로 하여금 자신이 앞에 보았던 것들을 스스로 되짚게 하는 것, 그것이 F의 방식이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일시적으로 위반된다던가 하는 일은 미시세계에서는 이미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결론적으로’ 질량 보존이 성립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미래의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예를 들어 2분 후의 내가 현재의 나를 만나러 왔다. 그 말은 곧 현재의 나는 2분 후 필연적으로 과거로 가는 시간 차원의 이동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한 시간 차원에 두 명의 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2분 뿐이다. 만약 2분 후에 과거로 가게 된다는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100%가 아니라면 시간 차원의 이동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시간 차원의 이동이 일어난 것, 그 자체가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100%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과거의 우리가 미래의 우리를 만났다면 그것은 현재의 우리가 시간 여행에 성공했음을 보여주는 100%짜리 증거이다. 즉, 시간 차원의 이동은…’
문득 P는 F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우리가 보존의 불확정성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면, 그리 된다면 F는…
‘과거로부터 증명된다.’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으리라- 말했던 것을.
P는 시간 여행기를 타고 허공을 향해 총을 겨눴을 F를 떠올렸다. 도시의 전력을 훔친 그 순간, F가 장치를 작동시킨 그 순간, F의 죽음은 100%의 현실이 되어있었다. F는 F를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렇구나. F를 죽인 것은 현재의 F이자 과거의 F였다. 죽은 것은 미래에서 온 F를 죽이고 과거로 간 현재의 F이자 과거의 F였다. F는 F를 죽이고 과거로 가 F에게 살해당한다. 두 명의 F가 만난 것은 찰나였겠지. 질량 보존은 찰나에만 어겨질 수 있으니까. 아무튼 F는 스스로를 쏘았다. 그리고 2분 뒤, 과거로 가 스스로가 쏜 총알에 맞았다. 도시의 전력을 앗아가면서, 시간 여행을 하면서까지 F는 F를 만나고, 또 죽이고 싶어했다. 어째서.
P는 F가 시간 여행을 해냈다고 생각한다. 어떤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F라면 그랬을 것이다. 이 밀실이라면, 이 상황이라면. 이것말고는 답이 없었다.
4
진실처럼 보이는 진실을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P는 여전히 F를 이해할 수 없었다. F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납득할 수 없었다. F가 세상에 대해 어떤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음은 어렴풋 알고 있었다. 인간에 대한 실망. 안일함에 대한 실망. 언젠가 F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자격없는 권리를 누리고 있지 않느냐고. 이 광대하다 못 해 너무 거대해서 숨이 막히는 현실에서, 정교한 톱니바퀴를 밟고 서 있지 않느냐고. 그 바퀴 아래에서 죽어가고 파괴되며 상처받는 것들을 외면한 채. 그러나 P는 쉽사리 공감하기 어려웠다. 생명이란 본디 그런 것 아니던가. 그것에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냐고 물었을 때, F는 답했다. 살고 싶으니까. 그 욕망을 거스르라는 소리가 아니야. 다만 살고 싶다면 자신의 뻔뻔함에 괴로워해야 하지 않겠어-라고. P는 동의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그런 P와 달리 F는 그의 말처럼 온힘을 다해 괴로워하고 있었다. 혹자를 그런 그를 두고 어리석다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F는 괴로워하는 동시에 우리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어째서 당신들은 괴롭지 않느냐고. 어째서 이 부조리와 불합리를 외면할 수 있느냐고. 우리는 그것을 외면했고, 이해하지 않았으며, 인정하지 않았다. 인정하는 순간 괴로워질 것을 우리 모두는 은연 중에 알고 있었다. 괴롭고 싶지 않은 마음. 이기적이라고 욕하기에는 너무도 나약한 것. 그러나 나약하기는 F도 마찬가지였다. 나약해서 견딜 수 없을 괴로움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F는 견뎌내고자 했다. 그것이 F가 F를 죽인 이유였다. 적어도 P는 그렇게 생각했다.
P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자기혐오감을 피하지 않았다. 발끝부터 시작되어 섬유를 타고 촘촘히 짜여 올라오는 묵직한 천을 몸에 걸치고 단추를 꼭 채웠다. 까슬한 표면이 온몸에 소름이 돋도록 바스락 거렸다. 곧 아릿한 통증이 전신을 장악했다. 이것이 F가 느낀 감정일까. P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울컥 올라오는 감정이 섬유를 찢어내고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안온함에 젖은 자신은 이 잠시의 괴로움도 견디려 하지 않는 인간이 되고 말았다. 심신이 마모되어 가기 전에 발현된 자기 방어 기제는 P를 괴로움으로부터 지켜내었다. 그러나 그 자기 방어 기제가, P의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자긍심을 깨트렸다.
P는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전과 같이 안온함 속에서만 살아갈 수는 없으리란 것을. F의 시신을 줄곧 상기하며 이따금 자기혐오의 옷을 입고 자기방어기제에 자긍심이 깨져갈 것을. 전과 다름 없는 일상을 영위하면서도 해소되지 않는 환멸감이 자신을 괴롭힐 것을. 그리고, 과거의 자신이 F를 알려 하지 않았던 것은,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것을.
과거가 더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현재가 더 좋았던 적도 없었다.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서나 괴로움은 늘 존재했다. 보이지 않는 괴로움과 보이는 괴로움이 공존할 뿐이었다. 같은 괴로움을 반복하느냐 반복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지 않았다면 과거또한 우리를 부르지 않았으리라. 과거의 괴로움이 다시 찾아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랬다면, 우리가-그리고 F가 시간 여행을 하고 싶어하지도 않았으리라.
이것은, 이미 과거로부터 증명된 것이었다.